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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공소리 칼럼니스트
  • 칼럼
  • 입력 2022.01.20 17:01

[공소리 칼럼] 업계 관계자가 나에게 ‘자자’고 말했다

▲ 픽사베이 제공.

[스타데일리뉴스=공소리 칼럼니스트] 업계 관계자가 나에게 ‘자자’고 말했다. 그 사람은 유부남인데 말이다. 그는 나를 안으면서 재차 ‘나랑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그 관계자를 달래주고, 이런저런 장황한 이야기를 하면서 집에 가야겠다고 했다. 너무 당황했지만, 우선 그 순간에는 상황을 유연하게 풀면서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더 이상 강압적이거나, 나쁜 상황에 치닫지 않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니 현타(현실자각타임)가 왔다. 자고 일어나도 그 나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화가 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괜히 스스로를 탓하게 되고 온갖 감정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문제를 크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이상한 해프닝으로 빨리 이상한 감정들이 지나갔으면 싶었다. 그러다 마음먹은 건, 그 관계자와 그날 일에 대해 더는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지 말자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할 일이 아니라면, 나는 내 마음부터 책임져야 했다.

또 내심 업계 관계자인데, 나에게 불이익이 올까봐 걱정도 됐다. 많은 감정과 생각이 교차한 끝에 나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마음을 비우고 평소처럼 지내기로 결정했다. 없었던 일처럼 평범하게 시간이 흘러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기자로 활동하다 보면 업계 관계자들과 어울리게 되기 마련이다. 같이 대화를 나누거나 식사를 하는 공적이면서도 개인적으로 보이는 일들이 잦다. 서로 시간을 함께하면서 친밀도를 높이고, 서로 간의 관계를 형성하는 거다. 그 곳에 대해 알기 위해, 취재를 위해, 기사를 쓰기 위해서 등의 이유로 각종 관계자와 관계를 맺는다.

사람 사이다보니, 개인적으로도 친밀한 마음이 들고 친해지는 경우도 더러 있다.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는 경우도 생기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보통 관계자들과는 만나면 기분 좋은 사이지만, 사실 어려움도 있다. 특히 아직까지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성이 많다. 기자들도 남성이 많다. 사회에서 이성보다 동성에게 좀 더 유연하게 다가가기 쉬울 때가 있다. 그런 점에서 내게는 더욱 업계 관계자가 어려움이 있는 존재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관계자에게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친하지 않은 사이라서 잠시 망설여졌지만, 그렇게 만나면서 친해지겠구나, 생각하고 약속을 잡았다.

다른 사람도 부를 것처럼 말하더니 결국 둘만 있는 자리가 됐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성별을 떠나 사람과 사람이고, 사회적인 관계이니까 말이다.

그 관계자는 내게 엄청 친근하게 다가왔다. 나에 대해 호평 일색이 줄을 지어, 민망할 정도였다. 나는 내심 ‘이 사람이 나랑 친해지고 싶었구나.’라고 생각했다. 물론, 굉장히 순진한 착각이었다.

그러다 그 관계자가 나에게 ‘자자’고 말한 것. 실제로는 청소년보호를 위해 발언할 수 없는 그것을 하자고 말했다.

나는 여자 기자로 활동하면서 실제로 그런 일들은 있었다. 성적인 농담부터 시작해서 더 노골적인 말과 행동들도 겪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어쩌다 성적으로 불쾌한 일을 당했다는 여기자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했다.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는 이야기는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보통은 불쾌한 일을 당해도 조용히 넘어가는 일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업계 관계자에게 그런 일을 당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사회적으로 이해관계이기 때문이다. 엄밀히 따지만 갑질 혹은 을질이다.

그리고 여성으로서도 수치스러웠다. 보통 이성적인 관심을 보이는 남자는 나를 조심스럽고, 어려워하며 존중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성적으로 저돌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무런 내용도 없어 어느 날 갑자기 나랑 ‘자고 싶다’니? 내가 존중받을 가치가 없는 여성인가, 싶었다. 그저 나에게 일말의 조심스러움과 어려움을 느낀다는 표현 하나가 없이 그저 성적 도구처럼 요구받은 것이 수치스러운 것이다.

백 번 양보해서 그 사람이 나를 좋아했다고 해도, 그 방식이 잘못됐다. 내가 어린 여자라서 만만했을까, 내가 무엇 때문에 존중받는 사람이 아닌 도구화가 되었을까, 자책하며 보낸 시간이 아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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